오늘 저에게 내려주신 영예에 대해서 깊은 사의를 표하고자 합니다.
더욱더 감명 깊은 것은 제가 이 평화상을 우리나라의 선조들과 교섭이 거의 없었던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로부터 받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선조들도 우리나라의 실존에 대해서 거의 몰랐을 것이라고 사료됩니다. 하지만 21세기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지속된 문명의 행진은 우리 모두를 하나로 통합시켰고 이젠 더 이상 그 누구도 우리에게 이 지구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 우리와는 무관하다고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오늘 우주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들은 우리 모두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움직임으로 인하여 서울 평화상문화재단이 설립되었고 또 제가 이런 영예로운 상을 받을 수 있게 되지 않았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 누구보다도 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대한민국도 체코공화국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의 번영 및 자립국가 수립을 위해 그 동안 수많은 자유의 박탈과 충돌을 겪은 국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이 이룬 위업에 대해 크게 칭송하는 바입니다.
명성 있는 서울평화상문화재단은1998년 잊을 수 없는 서울 올림픽 대회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자리를 빌어서 전체주의 정권에서 자라 그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주의가 성립되는 과정을 살아서 지켜본 축복받은 한 사람으로서 여러분에게 제가 느끼고 체험한 몇 가지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많은 세기를 거쳐, 유럽은 그들이 가진 각종 아이디어, 의견 및 영적인 사상들을 세계 여러 국가들에게 수출하고 또 받아들이도록 무력적인 압력을 가해왔습니다. 그중 몇몇은 매우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으며 또 사회주의라는 애매한 사상을 낳기도 했기 때문에 그다지 자랑스럽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끼친 좋은 영향력 중에 하나를 꼽는다면 바로 올림픽 게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근대 올림픽 게임이야말로 백 년이란 세월을 넘어 부활한 중후한 인본주의적 이상의 화신이라고 간주합니다. 올림픽 게임이 성립될 무렵 유럽에서는 차후에 세계를 위협하고 또 많은 인류의 삶을 앗아가게 되는 두 차례의 치명적인 군사 충돌이 은밀하게 준비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올림픽 헌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인간의 존엄성과 평화 공존의 정신은 아직 세계가 정치적으로나 권력 상관에 있어서 지정학의 근본과 사회적 변화를 예측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 때가 아주 민감하고 이례적이었던 시기였음을 보여주는 한 예로는 그 당시 불변의 것이라고 간주되었던 뉴톤의 상대성 원리와 양자역학이 거시적인 세계로 확장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 설명을 드리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적대소동 안에서 올림픽의 정신이 태어났으며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시야 또한 바꿔놓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움직임들을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알게 모르게 접합니다. 길고도 험난했던 세월에 지난 오늘 최고의 스포츠 성적은 유전 입력(genetic input) 에 의해 그 명성을 과시하고, 올림픽 메달은 그 값어치가 매우 고귀해졌습니다.
그렇다면 근대 올림픽의 이념에서 새로운 점은 무엇일까요?
아마 무엇보다도 먼저 개인의 성취, 우수함과 결단력이 인류의 보편적인 이상향의 하나로 새롭게 형성되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시간을 초월하여 보았을 때, 이 이념은 지구상에서 인간이 공존하는데 있어서 용인될 수 있는 최소한의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20세기에는 선수들이 대표하여 경쟁하였던 국가들은 생성되기도 없어지기도 하였고, 훈련 방법과 스포츠 패션도 계속해서 변해왔으며, 운동 도구와 시설도 계속 향상되어 왔지만 ‘아테네에서 아테네까지’ 지속되어 온 올림픽 본래의 이상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조화, 자유 그리고 책임감입니다.
보통 스포츠에서 정치가 참여할 여지가 없다고들 하지만 저는 실제 그렇지 않다고 믿으며 또한 그럴 수도 없다고 봅니다. 비록 은밀하긴 하지만 정치는 처음부터 올림픽 정신에 존재해 왔으니까요. 피에르 쿠베르탱 남작이 조화, 단결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논의할 필요를 느꼈던 것도 그가 경험한 현실이 이 이상들과 매우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올림픽 정신의 정의가 필요했다는 자체가 그 당시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반영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란 지극히 개인에게 한정된 직업으로서의 정치가 아니라, 공공에 대한 개인의 관심, 배려, 참여를 의미하며 또한 거미줄과 같이 다양한 인간관계 속에서 개인의 의지가 무수한 다른 이들의 의지와 대립되는 형태로서의 그것을 뜻합니다. 이러한 관계나 책임감이 정치인, 사업가, 예술가, 기술자 또는 운동선수에 의해서만 형성될 수는 없습니다. 인류의 다른 활동들로부터 한 활동을 고립시킨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쿠베르탱 시대에도 그랬지만 오늘날처럼 전 세계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모든 인류 활동과 같이 스포츠도 인간 사회의 문명화 과정이나 현재의 정치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말입니다.
그 동안 많은 글을 써 오면서 저는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지는 거짓말들에 대해 이야기해 왔습니다. 그 당시 저는 모든 사람들이 거짓말의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거짓말쟁이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진리로 살아가기(living in truth)' 라는 책을 쓴 것도 이러한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는 과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럼 여기에서 제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요?
전체주의 정권은 소수의 특권층에 의한 사회 억압을 기반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의 기반은 ‘용인된 거짓말’입니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박해 받는 이들은 주로 지식인층과 성직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전체주의 정권은 이들이 가장 식별력 있고 설득력이 있으며 군중에게 경고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없던 시대에 스포츠는 정권의 선전 수단으로 사용되기 쉽고 그 사회의 이데올로기 자체를 후원하거나 힘을 자랑하기 위한 목적으로 잘못 사용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서 집권 세력은 "스포츠의 순수성"을 강조하며 스포츠가 사회적인 상황과 관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노력합니다. 이러한 태도가 한편으로는 운동경기의 성적이 그 정권의 정책적인 입장에서 해석되는 등 정치적으로 다루어지고, 또 한편으로는 달리고 뛰고 싸우는 것 외에는 다른 생각을 전혀 하지 말라는 등 고의적으로 정치색을 없애려고 하는 역설적인 현상을 낳았습니다. 저는 이러한 현상을 용인된 거짓말의 한 면으로 간주합니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운동선수에게 가능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는 대신에 개개인의 업적을 그 체제와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해석합니다. 즉, 운동선수들은 정권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된 엘리트층이어서 그 정권이 아니었다면 그들의 우수한 성적 또한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개개인의 의지나 결의는 정권의 방책에 의해 일일이 부품들이 지정되어 있으며, 심지어는 주형까지 미리 정해져서 만들어진 합금처럼 개조됩니다. 어떠한 일탈 행위나 개성에 대한 주장 또는 선 밖으로 조금만 빠져 나오는 것도 처벌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런 현상은 다음과 같은 전형적인 패턴을 가지고 있습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운동에 재능이 있는 학생 한 명이 선수 팀으로 선발이 됩니다. 그는 한 해 내내 트레이너의 지도 아래 열심히 운동을 하게 됩니다. 또래 친구들이 게임을 하며 즐겁게 보낼 시간에 그는 격렬한 훈련 일과를 따라야 하며 그의 모든 정신도 그 곳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청소년기 또한 신체를 단련하며 적당한 기술을 익히는데 보냅니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이 목적 이외에 모든 것은 그의 인생에서 제외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그의 열정과 그에 따른 성공은 감탄할 정도이며 그래서 우리 모두는 이 젊은 청년이 이루어 낸 업적을 경이롭게 바라봅니다. 그는 자신을 억제하고 자신의 한계를 초월하며 결단력을 가진 상징으로 보일 것입니다. 모두가 그를 보며 감탄할 것이며 그는 그럴만한 자격을 갖추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유가 없는 모든 상황에서 그렇듯이 이 개인이 경기를 통해 얻은 성공은 정권에 의해 빼앗기고 그 체제의 승리로 해석됩니다. 그들은 수년간 땀 흘려 온 운동선수가 성공한 것은 결국 자신들 덕분이며 그들만이 제공할 수 있었던 모든 조건들이 없었더라면 그 운동선수는 아무 것도 아니었을 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 선수에게 자신의 업적이 정권의 정책 덕분이라고 찬양을 하도록 합니다. 또한 이러한 찬양은 공개적으로 해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그는 추방당하게 되고 평생에 걸친 그의 수고는 헛것으로 끝나게 됩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저는 운동선수들이 자신의 국가를 위해 경쟁하거나 자랑스럽게 국기를 착용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경쟁의 척도가 자유로워야 하며 지령이나 이데올로기의 지배가 아니라 스포츠 정신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헌장에서도 명시하듯이 올림픽은 선수들 간의 경쟁이지 국가나 정치 체제 간 경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국가의 현 정책에 대해 선수는 아무런 책임이 없으며 만약 선수들이 정치인들의 상식대로만 움직이려 한다면 아마 그들은 경쟁 자체를 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운동선수들은 그들의 재능과 결단력이 다른 이유로 교묘하게 이용되는 상황을 막아야 합니다. 전체주의 국가들이 스포츠의 순수성을 가장하여 그들의 업적에서 정치색을 없애는 동시에 그 업적이 정치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상황을 막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쨌든 올림픽 정신은 어떠한 상황과도 관계없이 결과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이루게 한 준비 과정, 즉 자기 억제, 자기 훈련, 자기 초월 그리고 의지력 강화 과정을 존엄성 있고 책임감 있는 삶으로 가는 수단으로 여깁니다. 스포츠와 운동 경기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사회 상황의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운동선수가 더 큰 명성을 얻을수록 그에 따른 책임감은 더 커지게 됩니다.
그 동안 스포츠에서는 아마추어와 프로 선수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아마추어 선수 자격과 프로 선수 자격 사이의 경계가 많이 낮아졌는데 이는 매우 좋은 현상이라고 봅니다. 또 하나의 ‘용인된 거짓’의 경우가 선명하게 떠오르는군요. 전체주의 시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우수한 운동선수들이 아마추어의 규정에 대해 사회를 속이고, 또 반대로 자신 또한 사회에 속았던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산당 정부가 스포츠의 순수성, 즉 비정치화는 아마추어 정신에서 그 기원이 시작한다고 열심히 선전을 했지만 결국에는 아무도 그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모든 운동선수들이 거짓으로 어딘가에 고용되어 있긴 했지만 아무도 그들을 직장에서 본 사람은 없었고 대신 그 선수들은 프로 선수들처럼 정기적으로 매우 열심히 훈련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직장에서 봉급을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들의 실제 수입은 운동 경기에서 얻은 성적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그러한 공식적인 기만행위로 인해 선수들이 소위 아마추어를 위한 경기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국가가 체코슬로바키아 한 곳 뿐은 아니라고 알고 있습니다. 전 세계적으로 프로 선수와 아마추어 선수를 구별하고 분리하려는 끊임없는 논의가 있었지만 프로 선수의 조건을 갖추고도 아마추어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갖가지 전략이나 속임수는 언제나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스포츠의 ‘프로화’는 스포츠의 ‘상업화’와 관련이 있습니다. 오늘날 운동선수가 여러 과학 기술의 발달로 인한 과학적, 기술적 편의의 도움 없이 최고 성적을 기록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많은 수단들에 대해서는 의심의 여지가 있지만 운동선수들이 왜 그것들을 이용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것들이 없다면 선수들은 결코 최상급의 선수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결과적으로 보았을 때 유혹적인 스포츠 환경은 무수한 기업들의 이익과 그 기업들의 이익의 이해관계들로 복잡하게 얽혀 있습니다. 운동선수들은 왼 발목 전문가, 오른 발목 전문가, 공기역학 전문가, 보온성 있는 내의를 발명하는 화학자들의 목표가 됩니다.
적어도 이러한 것들은 선수들의 컨디션과 성적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게 되지만 운동선수 옆에 따라다니는 수십 명의 매니저들, 또 그 매니저들을 따라 다니는 매니저들의 광경을 보면 매우 불편하기 짝이 없습니다. 선수들의 성적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매니저들의 수입을 올리기 위해 운동선수들이 부자연스럽게 광고나 언론의 스포트라이트에 집중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 묻고 싶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러한 추세에 끝이 있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이런 상황을 다 아는 우리들이 어떻게 운동선수들의 성적에 대해 호감을 느낄 수 있을까요?
계속해 질문을 해 보자면 언론매체들은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한 선수를 신문의 첫 페이지로 장식하는 것을 좋아하지만 과연 우리들 중에 작년 노벨의학상 수상자가 누구인지 기억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사실, 노벨의학상 수상자의 연구 결과가 많은 이들의 고통을 없애고 인간의 수명을 연장시키는데 공헌하지 않는지요? 여기에 대한 답이 있다면 그건 아마도 이 분야의 연구는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엔 힘들고 너무 전문화된 것처럼 보이지만 스포츠에 있어서만큼은 우리 모두가 전문가라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언론 본연의 임무는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아이디어를 집중하여 적어도 그 원리에 대해서 만이라도 대중에게 전달하고 설명해 주는 데 있는 것 아닐까요? 안타깝지만 결론적으로 스포츠 경기는 우리가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다른 분야에서는 수십 년이 걸려 벌 수 있는 돈을 스포츠 경기에서는 돈을 좀 더 쉽게 벌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스포츠는 늘 ‘엔터테인먼트’라는 수단 안에 항상 갇혀 있게 될 것입니다.
물론 수백만의 시청자들이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고 있는 스포츠 경기를 동시에 관람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좋아하는 운동선수나 팀을 관람하는 태도는 어떨까요? 소파에 몸을 쭉 펴고 누어 여러 가지 스낵과 설탕이 과다하게 들어간 레모네이드 또는 맥주를 즐기며 보는 것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스낵과 음료수의 종류 정도이겠죠. 어쩌면 그 정도의 차이도 없을 수 있겠군요. 그들은 스포츠 경기를 마치 텔레비전의 한 쇼 보는 것처럼 볼 것이며 선수들의 격렬한 움직임을 보면서 가볍게 자극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여하간 운동을 할 정도의 동기를 부여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공원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 게임에 참여하기를 권유한다면 그럴 마음이 생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스포츠 경기를 텔레비전 시리즈물처럼 배경으로만 체험할 것입니다. 스포츠 경기를 텔레비전 화면으로 보는 것은 어쩌면 너무 비인간적이어서 운동선수들이 마치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라 외계인처럼 보일 수 있으며 시청자들은 경기를 보면서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그저 지켜보고 편들거나 불평하는 소극적인 방법으로밖에 즐길 수 없겠죠. 하지만 쿠베르탱이 제창한 정신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바로 참여, 창조, 진실입니다.
물론 평범한 집 뒤의 울퉁불퉁한 초원 뒤에서 최상급의 성적이 얻어질 수는 없습니다. 매우 엄격한 상황과 조건이 요구되고, 스포츠와 경기에 대한 경제적 지원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다음에 새로운 기회라는 형식으로 일부분 보상을 받게는 되겠죠. 하지만 비록 아마추어라고 하더라도 좀 더 적극적으로 스포츠를 즐길 수 있도록 홍보하고 노력하는 것은 스포츠 산업의 대표자, 광고, 언론의 힘에 달려 있다고 봅니다. 만약 스포츠가 계속해서 간단히 즐기는 쇼로만 남는다면 상업화의 측면에서는 크게 성공하겠지만 좋은 성적을 얻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대응해 나가야 할까요?
스포츠와 경기는 모든 사화변화의 한 부분으로서 앞으로도 계속 사회와 정치의 변천사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 당연합니다. 그리고 성공한 선수들의 이름들은 세계 모든 이들에게 기억될 것이고, 그들의 성적은 그 나라의 전화통신카드(Calling Card)가 되겠죠. 하지만 앞으로도 스포츠가 계속 안으로만 굽힌다면, 다시 말해, 오로지 성적만을 내기 위한 경기가 된다면, 선수들의 사명감은 사라지고 단순히 멋지고 상업적인 엔터테인먼트로만 치우치게 되지 않을까요. 운동선수들의 자기 억제, 자치 초월, 이기고자 하는 그들의 자세는 흐트러지겠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가 고귀하고 성결한 올림픽의 기상과 정신을 실천과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만 스포츠가 고귀하고 진정한 세계의 인스피레이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올림픽 경기를 인권과 소수문화를 탄압하는 나라에서 개최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그 나라에게 정치범들을 석방하고 개혁을 도입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야 합니다. 우리는 이 요구들을 끈기와 투철함으로 계속 내세워야 합니다. 중국이 다음 올림픽 경기를 훌륭하게 개최할 것이라고는 의심치 않습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인권 존엄성보다 광고나 기념물 판매수익이 더 크다면 그것은 올림픽의 정신과 위상을 배반하게 되는 것이며 그 책임 또한 우리 모두에게 돌아갈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한 팀이 되어 한 국기를 들고 올림픽 경기에 참여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입니다. 만약 이것이 진정 자유와 민주주의를 향한 발걸음이라면 이전에 함께 속해있던 것은 다시 함께 속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