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평화상위원회 이철승 위원장님, 내외 귀빈, 신사 숙녀 여러분,
과찬의 소개 말씀 감사합니다. 우선 유엔을 대표하여 서울평화상 수상의 영예를 주신데 대하여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후안 안토니오 사마란치 국제올림픽위원회 위원장, 죠지 슐츠 전 미국 국무장관, 국경없는 의사회와 같은 훌륭한 수상자의 뒤를 이어 이 영예를 안게 된 것을 큰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저는 유엔의 50년 평화유지 기간 중 평화를 위해 목숨을 바친 1,500명 이상의 희생자 여러분께 이 상을 바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건국 50주년을 기념하는 이 때에, 우리는 유엔 평화유지 50주년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올해는 평화유지라는 새로운 임무를 띠고 새로운 기치 아래 병사들이 전쟁터로 나선지 50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러한 평화유지 노력은 인류 역사에 전례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러한 노력은 가장 선한 인간성으로 가장 악한 인간성에 맞서 이를 물리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폭력에 관용으로, 완력에 절제로, 파괴에 대화로, 전쟁에 평화로 맞서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그 날 이후, 날이면 날마다, 해가 바뀌어도, 유엔 평화유지 요원들은 신념을 잃지 않고, 굴복하지 않고, 또 좌절하지 않고, 분쟁 현실과 그 위협에 맞서 왔습니다. 1948년이래 총 49회의 유엔 평화유지 작전이 수행되었습니다. 그 중 36회는 유엔 평화유지군이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해인 1988년 이후에 실시되었습니다. 총118개국으로부터 750,000명이 넘는 군인 및 민간 경찰 요원과 수천명에 달하는 민간인이 유엔 평화유지 작전에 참가하였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14,000명의 평화유지 요원이 그 임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앙골라에서 서부 사하라, 그루지야, 자무, 카시미르에 이르기까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그 용맹스러운 아들딸들을 파견하여 유엔 평화유지 임무를 꾸준히 지원하여 왔습니다. 또한, 한국 정부는 지난 해 '예방 조치를 위한 신탁 기금(Trust Fund for Preventive Action)'에 25만불을 기부함으로써 우리의 보다 폭 넓은 평화유지 노력을 지지하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은 대한민국의 영예이자 우리 유엔의 영예이기도 합니다.
존경하는 신사 숙녀 여러분,
양대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탄생한 유엔은 그 무엇보다도 평화를 추구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헌장에도 항구적으로 명시되어 있듯이, "후손들을 전쟁의 재앙에서" 구하는데 그 설립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우리의 평화유지 노력이 그러한 다짐에 여실히 부합된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헌장 어디에도 그러한 작전을 구체적으로 규정한 바는 없습니다. "평화유지활동"은 그 시초부터 사전 계획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평화유지활동의 커다란 장점의 하나라고 생각됩니다. 유엔은 정적이거나 경직된 조직이 아니라, 동적이고 혁신적인 조직이라는 사실을 이 평화유지활동이 입증하였으며 또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임무가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릴지라도 위안을 주고, 장애물을 우회하여 길을 찾아내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하는 우리 유엔의 역량은 그 수많은 활동을 통해서 입증되었으며, 사실, 평화유지활동은 그러한 많은 활동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유엔 평화유지활동은 경계가 분명한 완충 지대와 휴전선 정찰에서 시작하여 1990년대에 들어서는 훨씬 더 복잡다단하고 다차원적인 작전으로 발전하였습니다만 그 길은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화유지 요원들에게 거는 기대는 그들에게 지원되는 각종 장비와 물자를 능가하기가 일쑤였습니다. 그들에 대한 요구는 현지의 실정을 무자비하게 무시해 버리곤 하였습니다.
지난 수십년간에 걸쳐서 우리는 나미비아, 모잠비크, 엘살바도르 등지에서 그리고 과테말라에서는 오늘 이 때까지도,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성공을 거두어 왔고 또 거두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키프로스나 중동의 경우처럼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교착상황에서 우리는 침착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또한, 르완다나 구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곳에서는, 우리는 그 끔찍한 만행에 선뜻 나서서 행동하지 못하고 준비 상태로 대기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바로 여기에 평화유지활동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백색 차량에 청색 헬멧을 쓴 경무장 군대가 모든 분쟁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어렵게 터득하였습니다. 평화란 지켜지기에 앞서 만들어져야 하거나 강제되어야 할 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참화, 인명 손실, 도시와 마을의 무자비한 파괴, 평상시 같으면 서로 인종이 다른 사람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인류의 터전을 산산이 부숴 버리는 행위에 뼈아픈 고통과 슬픔을 금할 수 없으며, 그러한 만행을 저지르는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까지나 가장 뼈아픈 나날들을 잊지 않는 가운데 우리의 가장 자랑스런 업적들을 쌓아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는 분쟁이 만연하고 먼 이국의 같은 인류가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집안에만 안주하려는 사람들의 운명론에 굴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냉소주의자가 하는 답변이요 비겁한 자가 내놓는 해결책입니다. 결코 우리의 답변이나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평화유지활동이 모든 분쟁의 해결책이 되어 왔다고 내세울 수는 없습니다. 더군다나 그러한 활동이 대량학살의 재발을 방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는 일은 유엔 역사 반세기 동안 그 "청색 헬멧"이 수만 명의 생명을 구했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
유엔 평화유지활동의 임무는 계속되어야 합니다. 아직도 너무나 많은 할 일이 남아있고,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죄없는 목숨을 잃고 있기에 우리가 지금 그 현장을 떠난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습니다. 결국, 평화유지활동이 한 약속은 전쟁을 끝내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평화유지활동은 분쟁의 재발을 미연에 방지하거나 적어도 지연시키도록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리하여 장기적으로 평화유지활동은 세계 모든 민족이 열망하는 지속적인 평화를 한층 한층 다져 쌓아 나아갈 수 있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임무에는 인권을 유린하기보다는 수호하는 훈련을 받은 정규 경찰의 설치뿐만 아니라, 도로 학교 병원의 보수와 같은 기초적인 일도 포함됩니다.
또한 법의 지배를 확립하고 자유 선거를 비롯한 민주 체제를 수립하는 일도 그 중요한 임무인 것입니다.
이러한 임무가 완수될 때 비로소, 분쟁의 종식과 평화 협정은 전쟁의 참화에 고통받는 국가들이 그렇게 갈구하는 안정된 미래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훌륭한 통치, 투명하고 민의를 수용하는 법에 의한 지배는 제자리를 찾아 튼튼한 뿌리를 내리게 될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이러한 사회에 투자와 성장을 기약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진정 전쟁이라는 방법은 평화의 작용에 그 자리를 내주었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내외 귀빈 여러분, 신사 숙녀 여러분,
구약의 이사야서에는 "그 무리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구절은 결코 이루지 못할 인류의 이상으로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유엔 평화유지 요원들이 그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이러한 인류의 이상에 거짓보다는 진실을 더해 주고, 불가능성보다는 더 큰 가능성을 가져다주고, 죄지은 자를 부추기기보다는 죄없는 사람을 더욱 보호해 줄 수 있을 때, 그들은 맡은 바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평화를 수호하려는 의지는 모든 민족들이 그리고 모든 이해 당사자들이 저마다의 가슴속에 품어야 하는 것이지만, 평화로 나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일 뿐이며 우리 유엔은 그 길을 닦을 수 있습니다. 서울평화상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유엔이 이러한 일들을 해왔다는 사실을 인정함과 동시에, 다음 세기에도 우리가 계속해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우리에게 심어주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